-
포기하는 방법소회 이상 글 미만 2020. 1. 4. 02:05
'포기'하면 생각 나는 곡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거나, 포기하면 시합이 거기서 끝나버린다거나 아키라메타라 다메... 등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다. 비록 그 말들이 나를 향한 것들이 아니었고, 대부분 일본 스포츠물, 열혈계, 아니면 하와와 모에물에서 나온 거였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포기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포기를 잘하는 줄 알았다. 뭐든 쉽게 그만둘 수 있었고 또 금방 질렸으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종종 비웃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마음속에 박혀있던 것 같다. 지금에야 인정하는 거지만 나는 포기를 못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자포자기였다.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싶으면 퓨즈를 끊듯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이런 말을 자라나는 청소년한테 하다니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놓아버리면 그래도 마음은 조금 편해진다. 적어도 포기하기 전에 겪던 종류의 고통은 이내 잠잠해진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감정을 애써 무시해야 한다. 포기 안 해봤자 별 거 없었을 거라거나, 사실 그렇게 간절한 것도 아니었다고 자기 위로를 한다. 포기해버린 현재의 자신과 대비되는, 포기 안 했을 경우의 자신이나 포기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분명 포기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도 않다.
안 편해요. 안 선생님... 포기하면 편하다는 생각은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동일한 생각이다. 두 생각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같은 논리구조를 공유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포기하면 안 된다거나, 포기하면 편하다는 것은 포기 or 포기하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을 상정한다. 포기하지 않을 경우 고통스럽겠지만 그에 따른 결과가 따라올 것이고, 포기할 경우 원하던 것은 얻을 수 없겠지만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정리하니 얼마나 허술하고 낭만적인 생각인지 금세 티가 난다. 포기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고, 그 과정이 생각 외로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포기할 경우에 우연히 원하던 것을 얻을 수도 있는 데다 포기했단 것만으로 마음이 쉽게 편해지지도 않는다. 세상살이 간단하면 참 좋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붙잡고 있으면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게 될 것이고, 먹어보지도 않은 포도를 신맛일 거라고 매도하면 찬란한 세상에 나 홀로 음침할 것이다. 내가 포기하고 싶어서든, 상황이 도저히 안 따라와서든,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면 조심스럽게 그리고 잘 포기해야 한다.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든 원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걸 부정해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그걸 포기하지 않았을 경우 무엇을 기대했는지도 부정하면 안 된다.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과거의 자신과 단절되는,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든 삭이는 일이 어떻게 고통 하나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과거의 욕망은 과거의 것일 뿐이다. 내가 과거에 그것을 바랐고, 결국 '지금은'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의 욕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그 욕망이 과거의 것일 뿐이라며 현재와 선을 긋는 것밖에 없다욕망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우리는 떄떄로 과거의 욕망을 부정한다. 부정되는 것은 비단 과거 뿐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다지 바라지 않았고, 따라서 지금도 그다지 바라지 않고 있으며, 혹시라도 욕망이 이루어졌을 미래에조차 그다지 바라고 있지 않았을 거라며(미래완료) 과거, 현재, 미래의 욕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행위다.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도, 결코 오지 않을 미래도 바뀌지는 않는다.
본인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반드시 끔찍한 결말을 맞는다. 일단 피해의식이 생기고 잡생각이 많아지며 성격이 음침해진다... 누가 코리안 아니랄까 봐 마음속에 한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좀 좋을까. 욕망을 부정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확신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과거에도 무엇인가를 바랐던 것 같은데 그걸 이미 부정해버렸으니 자기가 뭘 좋아해 온(현재 완료) 사람인지 흐릿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게 되고, 새로 뭘 좋아하게 되더라도 미심쩍게 된다. 자연히 새로운 것을 시도할 용기 또한 줄어든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일상적인 영역까지 침범당하게 된다. 음식이 덜 맛있어지고 영화가 덜 재미있어진다. 삶이 조금씩 무채색으로 변해간다.
그렇기에 포기를 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포기는 과거의 욕망을 인정하고, 객관화 함으로써 지금의 나와 분리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 어떻게 포기하는 상황이 된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객관화 함으로써,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포기의 포기'다. 무기력하게 포기조차 할 수 없는 상태와는 다르다. '포기의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욕망에 대한 결론을 내림으로써 과거의 욕망을 현재와 분리한다.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장 이 글만 해도 뜯어고치고 싶다. 하지만 '글을 끝마치는 것은 어디서 포기할지 정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나는 이쯤에서 포기하도록 결정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머무르며 현재의 선택을 내던지는, 자신에게 부리는 응석이다. 자꾸 그렇게 살면 어쩌다 로또라도 당첨돼 인생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말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 내가 저주라도 내리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 늘그막에 추억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음속에 온통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던 기억'만이 가득하면 너무너무 슬플 것이다. 과거를 과거로 놓아줄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근사한 미래를 맞이한다. 포기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 욕망을 그만 놓아주자.
'소회 이상 글 미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포도를 싫어하세요? (0) 2019.12.25 펭수는 펭수다. 그렇지만 (0) 2019.12.11 ㅗㅗㅗ (1) 2019.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