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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소회 2020. 4. 18. 14:44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남들도 이런 느낌으로 기분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술을 한창 마시고 있는 도중이나 마신 지 얼마 안 된 상태, 보통 술에 취한 상태에 경험하는 기분을 일컫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상태의 기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야 신이 나고 쉽게 흥분되기는 하지만, 평소랑 질적으로 다른 기분이 드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취하면 자제력이 많이 떨어지고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을 내뱉는 편인데 그게 별로 즐겁지 않다. 즐겁다는 감정을 파헤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즐거움이 재미와 같은 심미적 만족감에 한정되지는 않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술 취해서 하는 행동들이 재미있긴 하단 얘기다.) 따라서 술 취한 상태에서 신이 나는, 다시 말해 심미적 만족감이 증대되는 것만으로는 즐거운 경험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술 취한 상태가 즐거움에 기여했던 적은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으로 내 삶의 지평이 넓어진 경우 정도에 한정되는 것 같다. 술 마시면서 나눴던 좋은 대화들이나, 재미있었던 놀이(술게임이라든가)도 많이 있었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경험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즐거웠을 것 같다. 오히려 술에 취한 상태라 흐릿하게 경험한 것 같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화나 상황에서 느껴지는 즐거움보다는 술 마셔서 기분 좋은 게 내 기분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술을 먹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일들이 몇 생겼는데, 그게 너무 아쉽다. 나는 굳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마피아를 하고 싶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싶고, 솔직한 대화를 오래 나누고 싶다. 술을 마셔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더욱 생생한 상태로 말이다.
대화에 대해서는 더욱 더 이런 바람이 강해지는 것 같다. 나는 좀 내성적이고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ㅋㅋㅋ 사람이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꾸 내 생각보다는 이 상황에서 뱉어야 할 법한 말을 뱉게 되는데, 평소에는 좀 안 그러려고 머리에 힘을 줘서 노력하는 편이다. 예를 들자면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존맛탱' 같은 말은 가능하면 안 하려고 노력한다. 존맛탱이 나쁜 표현이어서가 아니고 그 말에 별 의미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이모티콘 같달까. 그런 표현보다는 나는 이게 맛있는데 어떻게 맛있고, 그로 인해 어떤 생각과 감정이 생겨났는지 표현하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머리에 아무리 힘을 줘도 대부분의 경우는 존맛탱 같은 반사적이며 기계적인 표현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리고, 나는 고장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의식이 생겨버린 로보트가 된 것 같다. 지행합일이란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겨우 이 정도 일에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감을 느껴야 한다니 조금 억울하다. (그냥 정신병인가?)
술 마신 상태에서는 제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에 자의식이란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기수를 잃은 말처럼 마음껏 날뛴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경청하기보다는 토를 달거나 대충 대답한다. 사실 술 마시고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드립칠 기회만 엿보고 있다. fully functioning 드립 머신이 되면 나도 상대도 즐겁지만, 즐거움은 한시적이고 후회는 오래 남게된다. 흑흑 좆같은 과거들이여.
술 마시면 기분 좋다고 해놓고 왜 나쁜 얘기만 하냐면, 내가 기분 좋다고 느끼는 시기는 술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기분 좋다고 느끼는 것은 술 마신 다음날, 숙취나 기타 부산스러운 것들이 (술값 정산, 어젯밤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등) 정리가 된 오후 즈음이다. 웬만큼 큰 주취 사고를 내지 않는 한 이 즈음에는 굉장히 평화롭다. 그리고 술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평소랑은 약간 다른 상태가 된다. 몸이 힘들다 보니 살짝 늘어져서 멍하거나 몽롱한 것도 같고 술기운이 남아있는 탓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도 자의식이 날아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온갖 생각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게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고요하고 찬란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적막 속에서 귓가를 맴도는 이명, 자그맣게 콩콩대는 심장, 손가락 사이에 드리운 햇볕, 머그잔을 타고 미끄러지는 도자기의 부드러운 광채, 냉차 한 모금의 아련한 달콤함. 평소에는 신경 쓰이지도 않던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온 세상이 환희에 찬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연약하지만 둥글고 따뜻하며 반듯하다. 나는 세상과 사랑에 빠진다.
미친 소리 같지만 진짜 그렇다... 드디어 심장을 얻은 양철 나무꾼이 된 것 같다고. 항상 내 감정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우울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이 채우는데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 믿는다.
이 '기분 좋은 상태'에서는(평소에는 나의 90%를 구성하는) 세상을 향한 불만과 불안 같은게 전혀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무능해지는 것 같다. 평소에는' ㅇㅇ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런 생각은 안 들고 느긋하게 멍 때리게 된다. 뭘 봐도 쉽게 재미있는 상태라 굳이 좋고 재미있는 걸 찾지도 않고 그냥 다 좋다고 생각하는 거 같음. 뭐 어디까지나 술기운이 만들어낸 호박마차에 불과해서 저녁 즈음에는 다 날아가버린다. 다시 또 약간 우울해지지만 그래도 세상과 사랑에 빠진 내가 보통의 나는 아니니까 원래대로 돌아온게 아쉽거나 하지는 않다.
우울감이 없으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정신병 없는 몇몇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여태까지 가끔 그런 사람들을 대가리 꽃밭이라고 놀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다. 술기운을 빌려 잠시 구경했던 거지만 정말로 그곳은 꽃밭이라 부를 만한 세상이었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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