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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는 펭수다. 그렇지만소회 이상 글 미만 2019. 12. 11. 08:28
'펭수는 펭수다'라는 문장에는 펭수가 인기있는 모든 이유가 담겨져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펭수가 특유의 날카로운 멘트와 사이다 캐릭터로 어린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뻔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얘기를 기대했거나, 펭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펭수가 어떤 아이인지 말하기보다는 펭수가 어떤식으로 작동하는 캐릭터인지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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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는 펭수다'라는 말은 펭수가 펭수가 아니라고 의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남극에서 온 EBS연습생 자이언트 펭귄 같은 것은 말이 안된다. 펭수는 인형탈 캐릭터다. 저 못생긴 인형탈 안에 다 큰 남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펭수는 펭수다'라는 말은 펭수는 펭수라고 믿고 싶은, 혹은 믿어야 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펭수는 무례하다. 상황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기도 하고 하인 부리듯 매니저를 불러대거나, EBS 사장 김명중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외친다. 무례함은 솔직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펭수는 상황에 관계없이 일관적인 무례함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솔직한 성격이라 여겨진다. 펭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이 위계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이며 뭇 어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사이다 캐릭터라고 말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다소 의문스럽다. 펭수가 정말 사이다 캐릭터인가? 그가 위계에 굴복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사장 이름을 시도 때도 불러대는 것은 무례한 일일 뿐이다. 사장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위계를 깨뜨린 것인가? 이런 행동이 사이다가 되려면 적어도 김명중 사장이 잘못한 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명중 이름이 마구 불리는 이유는 그가 사장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상황적 근거도 없다. 물론 기획과 편집을 담당하는 EBS 직원들 입장에서는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어떠한 조건도 없기 때문에 김명중 사장 이름을 아무 때나 불러대는 것은 그저 펭수가 무례한(혹은 자유로운)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며 영문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부분은 사장이란 직책이 대개 꼰대고, 권위적이라고 여겨진다는 점을 고려해서 어물쩡 넘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매니저를 종처럼 부리는 것은 명백한 갑질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아랫사람을 막 부리는 캐릭터를 연출할 때 필수적인 것은 캐릭터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캐릭터들은 희화화된 캐릭터이기 때문에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펭수는 희화화된 캐릭터가 아니다. 시청자와의 심리적 거리감은 크지 않다. 우리는 펭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시청하게 된다.
사실 펭수같은 성격의 캐릭터가 그렇게 드물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트렌디하고 흔한 편이다. 박명수는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예시다. 나아가 와썹맨의 박준형, 워크맨의 장성규, 문명특급의 재재까지 뉴미디어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은 자유롭고 솔직한 성격을 보여주며 때로는 선을 넘거나 무례하다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그 선을 지켜낸다. 펭수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행동들은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고 유머 코드가 된다. 펭수의 특별함은 바로 이 선을 지켜내는 방법에서 나온다.
펭수가 무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펭수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캐릭터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형탈 캐릭터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뿡뿡이나 엘모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이 역할극을 은근슬쩍 받아준다. 인형탈 캐릭터가 가짜라며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재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형극의 규칙이며 준수하지 않으면 관객으로 남을 수 없다. 그 캐릭터가 인형탈일 뿐이라는 판단은 유보된다. 일단 진짜라고 생각하고 봐 주는 것이다.
물론 관객의 유보적 판단이 인형탈 캐릭터의 사실성을 만들어내는 전부는 아니다. 인형탈 캐릭터들은 통제된 배경에서, 정해진 각본에 기초해 작동한다. 인형탈 캐릭터를 가짜로 보이게 만들만한 환경과 행동은 통제된다. 뿡뿡이 캐릭터가 스튜디오에서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놀이공원에서 풍선을 나눠주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자. 스튜디오의 경우는 모든 사람이 뿡뿡이를 뿡뿡이로 대한다. 그의 행동은 뿡뿡이로서 기획된 행동이다. 이 경우 뿡뿡이를 구태여 가짜라고 여길만한 요소는 배제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뿡뿡이가 가짜라는 사실이 더욱 명백하다. 사람들은 그가 놀이방귀를 뿡뿡 뀌어댈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뿡뿡이다운 말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풍선이나 잘 나눠주길 바란다. 최대한 뿡뿡이처럼 보이도록 행동하겠지만 별다른 각본이나, 캐릭터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순간적인 애드립 위주의 연기다.
펭수는 현실을 배경으로 삼는 인형탈 캐릭터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펭수의 무대는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한정적이지 않다. 펭수는 학교, 정부 부처, 다른 방송국 등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방문한다. 또한 펭수 컨텐츠는 많은 부분 애드립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스토리가 따로 마련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형극보다는 리얼리티 예능이나 보통의 유튜브 컨텐츠에 가깝다. 자이언트 펭TV가 사실적인 배경과 애드립 중심의 각본에도 불구하고 펭수 캐릭터를 진짜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비결은 컨텐츠를 오롯이 캐릭터쇼(펭수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이다. 펭수 동영상의 컨텐츠는 단일하다. 펭수라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이다. 펭수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는 배리에이션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부에 방문하더라도 외교부를 소개하지 않는다. 외교부를 배경으로 펭수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컨텐츠에서는 펭수라는 캐릭터가 가장 중점적이다. 그렇기 떄문에 펭수가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펭수가 진짜라는 것이 자이언트 펭TV 컨텐츠의 전제조건이다. 펭수가 가짜라고 해버리면 펭수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펭수를 진짜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펭수가 진짜라고 동의하면 펭수의 설정들 또한 진짜라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펭수는 10살짜리 남극출신 자이언트 펭귄(EBS 연습생, EBS 소품실에서 거주중)이다. 이와 같은 말도 안되는 설정은 펭수의 까방권이 되기도 하고, 펭수 컨텐츠의 유머코드가 되기도 한다. 자이언트 펭귄이라니 정말 귀여운 설정이다. 원래 귀여운것이 커다라면 더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도식이다. 거대고양이나 대왕꿀떡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자. (자이언트 펭귄이라는 설정에 따르면) 펭수는 귀엽고, 어리기 때문에 다소 무례한 말을 하더라도 용인된다. 못생긴 인형탈을 뒤집어 쓴 성인 남성이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불쾌했을 말들이 펭수가 진짜라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귀엽고 웃기며, 때로는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펭수가 진짜라는 것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펭수를 진짜처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가 인형탈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펭수에게 기대하는 성격과 언행을 생각해보자. 선을 넘는 듯한 솔직하고 자유로운 언행들이다. 이것은 결코 '10살짜리 남극출신 자이언트 펭귄'에게 기대할만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혹은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무례하게 굴었을 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성인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버릇없게 느껴질 따름이다. 노키즈 존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어린 아이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용인조차 못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재다. 우리는 그를 버릇없는 어린 동물 캐릭터가 아니라 탈을 쓰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성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행동이 펭수라는 캐릭터(10살 자이언트 어쩌구)이기 때문에 용인할 수 있다. 펭수라는 캐릭터가 진짜라고 믿는 동시에 가짜라고 여기는 것이 그의 행동을 용인하고 호감을 느끼는 비결이다. 시청자들은 만들어진 설정들과 인형탈을 뒤집어 쓴 성인남자라는 사실 중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을 얼기설기 취사 선택함으로써 펭수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이라 여기게 만드는 자발적인 인지편향에 빠져든다.
사실 나는 그것을 문제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는 좋아할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게 되기도 하지만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할 이유를 끼워맞추게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점이다. (캐릭터쇼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만)자이언트 펭TV 컨텐츠는 부실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개그들을 펭수 캐릭터를 통해 답습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이언트 펭TV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펭수가 얼마나 괜찮은 애인지 변명하듯 내뱉는다.
펭수를 순수하지만 사이다인 캐릭터로, 어린아이지만 뻔하고 재미없지 않은 캐릭터로, 때로는 자폐아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시청자의 기대를 스스로 만족시킴으로써 안정감을 선사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마디로 펭수라는 캐릭터가 완결성이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펭수의 설정들은 계속해서 충돌한다. 시청자들이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상술했듯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무례한 행동이 용납되지만, 그 행동은 '어른'의 것이다. 펭수가 성별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행동과 설정들은 남성적이라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는 펭수가 인형탈일 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처럼, 그가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10살짜리 무성적 펭귄이라고 믿는다. 현실을 회피하니 무엇인가 계속 거슬릴 수 밖에 없다. 펭수가 탈권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위계적 폭력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사장(=높은사람)은 나쁘다는 일종의 피해의식만을 반복재생산한다. 사장은 원래 나쁜 사람인가? 위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계를 옹호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펭수를 무성적 존재로 설정하면서 성성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기만 하는 것이 어떤 전복적 효과를 낳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탈 안에 들어있는 것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펭수의 무례한 행동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어느정도 남성이라고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척함으로써 해당 논제들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회피하고 기존의 권력 관계를 미필적으로 옹호한다.
...아 시발 못쓰겠다 이젠 펭수가 싫은 것보다 펭수를 싫어하는 나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됐음 (ㅈㅅ)
하고싶은 말은 EBS는 세금받는 공영방송이면 이런거 안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성과가 중요한거 알겠고, 시대에 맞춘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거 알겠는데 굳이 안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초등학생만 되어도 EBS 안보는게 신경쓰일지라도, 기존의 컨텐츠 답습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음? 솔직히 자이언트 펭 TV 볼 바엔 워크맨이나 문명특급 보는게 낫지. 펭수 좋아하는 것도 귀여워 할 캐릭터로 좋아하는 거가 전부 아닌가. 펭수 좋아하는거 딱 두 종류로 나뉘는데 장성규를 보기엔 그의 남성성이 너무 거슬리는 사람이거나, EBS산 캐릭터가 성공적이라는 사실에 열광하는 속물이거나
으 지긋지긋한 한국. 공공성에 대한 논의나 공공 브랜딩 성공 사례가 희박해서 뭐 하나 성과가 좋으면 난리치는거 꼴보기 싫다. 펭수가 싫은게 아니라 별 대단한 이유도 없으면서 펭수 왜 좋은지 설명하려 드는 양반들이 싫은 거랍니다ㅗㅗ
+ EBS 인기 끌려고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쓴거였는데, 진짜 아동프로도 제대로 못만들고 있단게 밝혀져서(보니하니) 찝찝함 잘 좀 합시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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