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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는 무엇을 파는가 : 당신이 오늘도 고르지 못한 이유
    2020. 8. 18. 04:00

     

     

    저녁 10시 30분, sns의 피드를 다 따라잡고 유튜브가 지겹다고 느껴질 시간에 당신은 넷플릭스를 켠다. 시청 중인 시리즈가 남아있지 않을 경우 어떤 방식으로 영상을 고르는가? '넷플릭스 인기 콘텐츠', '지금 뜨는 콘텐츠' 항목을 훑어봤으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한참을 구경하다 결국 선택한 것은 이름을 몇 번 들어본 15분짜리 시트콤이다.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로 어플을 꺼버릴 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이렇게 고르기 힘들까? 한 번쯤 재미있다고 추천받은 시리즈들이고 당신이 유별나게 까다로운 것도 아니지만 영상을 골라서 시청하게 되는 경우는 생각 외로 많지 않다. 몇몇 콘텐츠들은 고르지 않는 이유가 명백하다. 최신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시즌 6개를 해치워야 하는 경우나 너무 무거운 내용일 경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넷플릭스가 무수히 많은 콘텐츠를 보유하는 이상, 당신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어플을 끄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당신이 무엇인가 골라야 한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당신이 무엇인가 고르지 못한 이유이다. 

     

     

     


     

     

     

    보고 싶은 영상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보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다. 다달이 내는 사글세나 수도세처럼 넷플릭스 구독료는 이미 납부되었고, 우리는 무엇이든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돈을 냈기 때문에 뽕을 뽑아야 한다는 식의 일종의 가성비성 불안만이 이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영상을 능동적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이전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영상 매체를 골랐을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상영 중인 영화 중 시간 맞는 걸로, 기간 한정으로 무료로 풀렸기 때문에, 명절 특선으로 해줘서 등 수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우연히' 그 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런 영상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지금 아니면 볼 일이 없다거나 다른 선택지보다 낫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즉 시청자의 내부적 동인보다 외부적 조건에 의해 선택된 영상들이었다. 시공간적 제약에 의해 한정판으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이 이 영상들을 '시청할 만큼'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반면 넷플릭스의 영상들은 언제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떠밀림도 없이 우리 안의 동기만을 무기 삼아 볼만한 영상을 골라낼 수 있게 노오오력해야 하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콘텐츠들을 이토록 '매력 없게' 제공하는 것은 그들이 판매하는 것이 영상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대표적인 구독형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게 이리도 자명한데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이 판매하는 것-우리가 구매한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구독권이다. 교환의 대가는 콘텐츠를 고를 기회이지, 콘텐츠를 즐기는 경험이 아니다. 그들은 판매 상품인 구독권을 한정품으로 만든다. 넷플릭스 전용 콘텐츠를 제작함으로써 그것들을 구독할 수 있는 권리를 한정품화 하는 것이다. 반면 그들의 상품이 아닌 콘텐츠 자체들은 전혀 매력적으로 셀링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매력조차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 제공된다. 

     

     

     

    여기서 대체 뭘 보란 말이오

     

     

    넷플릭스 내부의 콘텐츠 홍보 방식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추천 알고리즘, 썸네일, 소개 문구. 추천 알고리즘이야 ai의 영역이니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ai기반 추천이 결국 맨날 똑같은 것만 보게 만드는 게으르고 불완전한 방식이라는 것은 넷플릭스만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다른 두 가지에 비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콘텐츠 셀링의 무매력적인 특징은 썸네일과 소개 문구에서 가장 노골적이게 드러난다. 넷플릭스 콘텐츠들은 모두 동일한 구성의 썸네일을 통해 보여진다. 인물의 클로즈업을 크롭하고, 콘텐츠 제목을 살짝 옆에 곁들이는 이미지를 통해 모든 콘텐츠들을 표현한다. (가끔 인물 얼굴이 아닐 때도 있지만 큰 차이는 없다.) 소개 문구 또한 마찬가지로 동일한 구성을 보여준다. 'ㅇㅇㅇ하는 ㅁㅁㅁ는 ooo 한다'는 문장 구성으로 모든 콘텐츠들을 표현한다.

     

     

    어떻게 그레이 아나토미를 '인턴이지만 결국 레지던트가 되는 메러디스 그레이는 시애틀 병원의 동료 의사들과 함께 사적, 직업적인 열정에 휩쓸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지? 이런 문구를 보고 이 드라마를 보고 싶어 질 사람이 어디 있냐고. 보고 싶던 마음마저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일뿐더러 그 의미조차 모호하다. '결국 레지던트가 되는' 그레이가 '사적, 직업적 열정에 휩쓸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저 문장만 보면 모종의 이유로 레지던트가 되고 싶지 않았고,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이었던 그레이가, 유체이탈 같은 것을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내용일 것 같다. 물론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따라서 이 소개 문구는 매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오독의 여지가 다분한 잘못된 문장이다. 

     

     

     

    이게... 글리...?

     

     

    썸네일과 소개 문구가 제작되는 구체적인 방식은 모르겠지만 아마 다언어화와 사용자 중심적 정보제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괄적인 구성을 도입한 것이리라. (찾아보니 정말로 사용자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소개된다고 하네욤) 목표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러한 방식이 각각의 콘텐츠에 매력과 개성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통일감을 중시한 선택이다. (질 낮은 번역도 넷플릭스가 콘텐츠보다 구독권 판매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방증하지만 번역의 질이 콘텐츠 선택 단계에서 큰 영향을 끼칠까? 번역이 구리다는 사전 정보 없이는 어려울 듯 )

     

     

     

    왓챠플레이

     

     

    왓챠플레이와 비교를 해보자면 왓챠플레이의 경우 콘텐츠의 제목을 썸네일 밖에 표기해서 비교적 다양한 이미지의 썸네일을 보여준다. 또한 위 이미지 속 '컬렉션'처럼 큐레이팅에 방점을 둠으로써 콘텐츠 경험을 강조하기도 한다. 약간의 차이는 두 서비스의 이용 경험과 셀링 포인트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오리지널 시리즈를 제외한다면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는 왓챠플레이에 더 많다는 건 이제 공공연한 사실 아니겠는가. 왓챠플레이가 넷플릭스 같은 전 세계 호환 가능 서비스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더 높은 퀄리티의 영상 콘텐츠 향유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뭐든 보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넷플릭스보다 왓챠플레이에서 영상 고르는 게 훨씬 쉽다.) 

     

     

    다시 10시 30분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무렵 넷플릭스를 켰다. 한국어 상으로는 '놀다'와 '쉬다'가 크게 구분되지 않지만, 이 두 개는 분명 다른 어휘다. 무엇이 노는 것이고 무엇이 쉬는 것인지 두 단어가 어떻게 그리고 왜 혼용되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간단하게만 짚어보자. 노는 것은 쉬는 것이다. 쉰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흔히 '힐링'이라 표현하듯이 우리는 놀면서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회복한다. '놀다'는 '쉬다'의 충분조건이다. 한편 쉰다고 해서 노는 것은 아니다. 놀면서 쉴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쉬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리고 저녁 10시 30분은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칠 무렵이다. 당신은 이러한 '쉬는 시간'에 넷플릭스를 켰다.

     

     

    우리는 이 시간에 특별한 동기 없이는 기를 쓰고 영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netflix & chill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처럼 쉬려고 할 뿐이다. 놀다와 쉰다의 구분이 와 닿지 않는다면 릴랙스란 말은 어떨까? 당신은 '인생 영화'를 보면서 릴랙스 할 수 있는가? 대체 누가 '킬링 이브'를 보면서 릴랙스 할 수 있지? 물론 누군가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릴랙싱 영화(...)를 인생영화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 '인생 영화'는 릴랙싱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쉬는 시간'에는 인생 영화나 드라마를 한 편 얼큰하게 조지는 것보다, 대충 둘러보다 고른 15분짜리 시트콤 한 편이 어울리는 법이다. 때로는 영상을 아예 보지 않는 편이 쉼에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netflix & chill의 일반적 의미처럼 말이다. 

     

     

    오늘도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넷플릭스를 껐더라도 혹여 자책에 빠지지 말라. '브루클린 나인 나인'을 보았거나, '버드맨'을 보았거나, 영상을 골랐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혹은 넷플릭스를 구실삼아 chill 했거나 당신은 이미 넷플릭스에서 산 것을 누렸다. 넷플릭스의 매력은 이토록 무수하고 매력 있는 콘텐츠들을 볼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후기 

    +10시 30분이라고 쓴 게 너무 기만적이라고 느껴지는군,,, 저는 보통 저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 왓플은 볼만한 게 너무 많아서 안 보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4900원짜리 초기 구독권이 아깝긴 하지만 고통을 견디지 못해 구독 해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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