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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미남 탐방기 하울편 반성문글 2020. 7. 22. 03:10
그냥 넘어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너무 오래 끌려다녔기 때문이거나 그 글을 쓴다고 여기저기 입을 털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 올린 '지브리 미남 탐방기 1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여성에게 인외남을'은 꽤나 엉망진창인 글이었다.
지브리 미남 탐방기 1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여성에게 인외남을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미남이라는 키워드로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겠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본 사람은 이 영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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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농담을 글로 써내려 했기 때문일까. 미야자키 감독의 미남 사랑을 강조하며 시작한 글은 소피에게 걸린 마법이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 여성주의적 당위성으로 엉성하게 끝을 맺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하울의 인외(괴물) 버전이 좋았고, 할머니와 젊은 미남의 사랑이라는 결말을 보고 싶은 오타쿠적(2차 창작적) 욕망에 패배한 결과다. 여성주의적 당위성으로 도망쳐서 여성 주체성 어쩌고 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젠더 권력을 문제 삼고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것은 때때로 아주 공허하다. '곶감이 잡아간다'는 위협이나, '북괴' 같은 선동적 어휘가 그러한 것처럼 여성을 피억압 대상으로 상정해 버리는 여성주의적 당위성의 결과는 반사적이고 방어적인 반응뿐이다. 이에 뒤따르는 것은 유의미한 논의보다는 무기력한 기싸움일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지난한 논의들이 적지 않게 계속되고 있는 오늘날 이 자명한 사실을 체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엉성한 여성주의로 끝맺어 버린 글에 남은 미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그 글을 뜯어고칠 엄두 또한 나지 않았다. 반 정도 웃자고 쓴 글이었는데, 회한과 죄책감을 마음속에 품은 채 너스레를 떨기 어려웠다. 원래 글이란 것은 고치는 것보다 새로 쓰는 것이 훨씬 쉬운지라 구차하지만 덧붙이는 글을 쓰고자 한다.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고부갈등 로맨스'로 읽는 것이 의도적인 오독이라 평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입장을 대변하는 척 하면서 놀리려는 의도였다. 창작자가 창작물에 관한 절대자가 될 수 없기도 하고 애당초 감상에 의도를 담을 수 있을 만한 감상자가 작품을 독해하지 못했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다이애나 윈 존스의 상큼한 원작 소설을 가져와 유리멘탈 비련 미남이나 뱃속에 구렁이를 품은 왕실 마법사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은유 범벅 음침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반전 메시지나 예쁘고 화려한 작화, 근사한 음악 같은 것들로 밝고 요란하게 포장한 하야오 영감의 앙큼함을 마구 놀려주고 싶었다.
이 감독... 생각보다 앙큼하다? 이 '앙큼함'이 그가 의도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원작을 뜯어고쳐 영화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기실 원작과 영화는 놀라우리만치 다른 이야기다. 움직이는 성, 불꽃마귀와 계약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미남 마법사, 마법에 걸려 할머니가 된 여주인공 정도를 제외하면 몇몇 고유명사만이 원작과 동일하다. 새로 만들어지거나 사라진 인물도 적지 않고 스토리도 아예 다르다. 하야오 영감의 앙큼함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원작과 유사하게 남아있는 골자(인물)가 감독이 새로 만들어낸 영화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리먼이라는 실종된 숙맥 왕실 마법사(男)를 요괴 할망구로 바꾸어 놓은 게 가장 웃기는 부분이지만 그 둘의 비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작의 하울도 영화의 하울처럼 겉멋이 잔뜩 든 거짓말쟁이기는 하지만 영화처럼 음침한 인물은 아니다. 계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밤마다 몰래 빠져나가 위험한 짓을 벌이지도 않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옛 스승으로부터 협박성 참전 요구를 받고 있지도 않다. 원작의 하울도 쫓아다니던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가벼움은 영화에서처럼 파멸로 이어지지 않는다. 원작의 하울은 소피를 단단히 속이는데 이 거짓말은 소피와 그의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뿐더러 그를 한층 더 매력적이게 만드는 장치다.
소피는 하울보다 훨씬 더 많이 달라졌다. 원작의 그녀는 자신의 삶이 장녀기 때문에 시시한 것이라 생각하거나, 하울을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도망가려 하지만 주변 사람들(특히 그녀의 자매들)을 아끼며 그들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녀는 사고도 치고 수습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거나 질투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기도 한다.(그녀는 하울에게 의견을 피력해 꽃가게를 차린다.) 또한 그녀는 능력있는 모자 장인이며 심지어 마녀기도 하다.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만 영화 속의 소피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해 보이지 않는다. 좀 억울한 것이 이랬던 원작 인물을 소심 장녀 생쥐 아가씨로 바꾸어놓고 집안일만 잔뜩 시키는데 여성 혐오적이라 비판하지 않을 재간이 있나? 나는 편견이 가득한 사람이라 일본 애니 여캐라는 말만으로도 덜컥 겁이 나는데, 실제로 원작에 비해 사정없이 납작해진 인물을 보고 여성 혐오적이라 느끼지 않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소피의 '저주'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까닭은 단지 '정상적'인 헤테로 로맨스 결말을 위한 것이라 비판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헤테로 로맨스 정상성을 위해 소피의 주체성, 나아가 마법이 풀리지 않고도 행복해질 가능성을 일축하는) 결말이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이었다. 마찬가지로 소피의 저주가 풀리지 않고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 질문에 다시 한 번 답해보자면 단언컨대, '아니오'다.
저 질문에 '예'라고 답했던 지난 글은, 상술했듯 여성주의적 당위성에 따른 것이었다. 아시잖아요. 남자 없이, 나이들고도, 예쁘지 않아도, 뚱뚱해도 행복할 수 있냐는 질문에 언제나 그렇다고 답하게 된다는 것을. 정말 그런지 왜 그런지 따져볼 여유 같은 것은 없고 일단 그렇다고 하고 봐야 본전이라도 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소피의 저주가 풀리지 않고 그녀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미야자키 감독이 음험한 여혐종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소피가 원작에 비해 납작해졌다면 다른 캐릭터들은 어떠한가? (납작쿵 사라져 버린 캐릭터들이 적지 않지만...) 미야자키의 하울은 입체적 인물인가? 물론 이러저러한 사정(비밀)들을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해당 캐릭터의 입체성을 방증하는가?
*입체성이란 게 정확한 용어일지 잘 모르겠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입체적 인물이란 "변화하는 인물이고, 다면적인 인물이며, 독자에게 놀라움을 주는 인물"이다. 나는 입체성에 관해 놀라움이나 변화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체성이란 여러 가지 부분적 자아들의 결합(혹은 결집) 일 개인의 다면적 특성이 서사 안에서 드러나는 정도라고 받아들인다. (어디까지나 뇌피셜이고 이론 같은 거 모름) 즉 캐릭터를 다양하면서도 내밀하게 보여줌으로써 이입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다. 나는 이것을 '주체성'과 구분 짓고자 한다. 주체성이란 자연히 그러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주체적으로 행동하다' 등의 일상적 표현에서도 자주 만나는 개념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정의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부자유한 형태의 주체성 또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주체성을 띄는 존재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어떤 캐릭터가 다음에 자연히 어떤 행동을 할 거라고,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리먼이 갑자기 전쟁을 그만둘지 누가 알았겠냐고) 반면 그들이 입체적인 인물인지 묻는다면,,, 음 글쎄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인물 중 속마음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인물이 있기나 한가? 일본 애니에서 독백에 방백에 내레이션까지 동원해서 인물의 생각, 감정, 사상 등을 구구절절하게 표현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대조적으로 하야오의 인물들은 아주 '과묵한' 편이다. 그들의 생각을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에 의뭉스럽게 느껴지거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하야오의 인물들은 대단히 주체적이지만,(혹은 그렇기 때문에) 평면적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는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도통 그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떄문에 하쿠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이러다 뒤통수라도 치는 거는 아닐지 알 수 없다. 서사의 중심인 주인공 캐릭터(소피나 치히로 등)는 그나마 이입하기 쉬운 편이지만 그들 또한 때때로 왜 이러는지 모를 행동을 한다. 미야자키의 세계에서 캐릭터들은 말하기보다는 행동하고, 들려주기보다는 보여준다.(미야자키 캐릭터들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함, 연예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있는 것처럼 속내를 모르겠는 캐릭터들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미야자키의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원인은 아마도 그가 여러 번 강조한 '인간 관찰'일 것이다. 타인을 관찰할 때 그들의 속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인물을 그려낼 때도 그들의 속마음이나 생애사 하나하나 담아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의 속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에서 특정 인물(소피)이 납작(평면적)하다고 여성혐오라 비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다른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짐에도 불구하고 한 인물만을 입체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윤리적 당위성이라면 전에 했던 말처럼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미야자키 감독의 이러한 인물 구축 방식은 여성주의적이라고 느껴진다. 언제나 과잉 주체화되기 쉬운 남성 인물에게도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것이 내 글의 제목이 '지브리 미남 탐방기'고 그 글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남 사랑으로 시작한 이유이다. '미남'이란 어디까지나 대상화된 존재, 즉 거리를 두고 만들어져 평면성을 띈 인물이다. 과잉 주체화된 존재는 미남이 될 수 없다. 감독이 만들어낸 남성 캐릭터들이 미남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하울이 미남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침한 사정과 속내를 구구절절 내뱉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캐릭터 디자인이 미형적이거나 서사적 개연성을 위해 미남이라고 설정을 덧붙이는 것과는 무관함, 대부분의 남자 주인공이 미남이 아닌 이유이기도 함) 다시 한번 말하건대,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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