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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브리 미남 탐방기 1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여성에게 인외남을
    2020. 5. 25. 02:58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미남이라는 키워드로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겠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본 사람은 이 영화의 감독이 정말로 미남에 진심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물론 아니겠지만)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서 하울이라는 캐릭터는 미스테리어스 하고 로맨틱한 미남으로 완성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미야자키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반전 주제의식에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건 좀 재미없는 생각인 것 같다... 미야자키 나이대의 노인과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나이대 사람들의 머릿속 한편에는 언제나 전쟁이라는 두 글자가 존재하고, 사실 그게 그렇게 심각하거나 대단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수도권 1호선에서 종종 만나 볼 수 있는 군복 입은 노인 분들이라도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할머니는 오늘 아침만 해도 콩나물 국이 싱겁다고 불평하시다가 한국전쟁 때 군인들한테 밥 먹여줬던 얘기를 꺼내셨다. 할머니는 자기는 전쟁통에도 콩나물 국 간을 기가 막히게 맞췄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미야자키는 하울과 소피의 로맨스의 배경으로 다시금 전쟁이라는 배경을 선택했을 뿐이다. 반전 텍스트가 존재하지만 이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굳이 그것에 천착할 이유가 없다.

     

     


     

     

     

     

    벌써 잘생겼다

     

     

    전쟁까지 동원한 으마무시한 로오-맨쓰라니... 자칫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역시 세계적인 거장은 다르다. 영화가 시작한 뒤 5분 5초 경 키무타쿠 목소리와 함께 하울이 등장하는 순간, 괜한 걱정은 끝난다.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들 하지 않는가. 하울의 등장 시퀀스는 단언컨대 이 영화 최고의 볼거리이며 누구라도 순식간에 하울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의 등장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은, 그와 팔짱을 낀 채로 괴물들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에서 점점 빨라지다가, 아름다운 테마(인생의 회전목마)를 배경으로 그와 함께 하늘을 걸을 때쯤엔 마구 쿵쾅대며 황홀감을 선사한다. 우리의 심장을 쥐고 흔들던 마법사 미남(미남 마법사 x)은 나타났을 때처럼 신비롭게 그리고 우아하게 사라진다. 나는 이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막이 내렸어도 별점 5점을 줄 것이다. 이 시퀀스만으로 관객은 바라던 모든 것을 얻었다. 성공적인 로맨스의 조건인 '관객을 설레게 하기'는 2분짜리 시퀀스로 초과 달성된다. 끝내주는 마법사 미남과의 로맨스에 전쟁 좀 동원하는 게 대수겠는가. 졌다, 졌어!!

     

     

    하울만 눈 안보이는 연출 


     

    해당 장면에 너무 만족해 버린 탓에 영화의 뒷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하울은 끝내주는 마법사 미남이 아니다. 이 영화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하울의 외모에 얼큰하게 취해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법사도 맞고, 미남도 맞고, 끝내주기도 하지만, 하울은 우리가 기대한 '끝내주는 마법사 미남'이 아니다. 소피가 움직이는 성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젠틀한 마법사 미남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던 하울은 금세 본색을 드러낸다. 하울은 자존감 낮은 겁쟁이였다. 누구라도 반라의 하울이 고작 머리 염색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난리 치는 장면에서 경악을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쉽게 절망하고, 외모 콤플렉스 덩어리에, 감정적이고, 의존적이다. 고작 염색 가지고 세상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는 것부터 꼴 보기 싫은데 마르클은 옆에서 전에 여자한테 차였을 때도 비슷했다며 말을 얹는다. 소피는 참 착하게도 하울을 위로하려 하지만 이미 자아조차 놓아버린 하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 정도면 로맨스고 전쟁이고 다 집어치우고 정신과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게 하울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것이다.

     

    하울의 한심함은 침대에 누워 소피에게 자기를 대신해 참전 요구를 거절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이 장면은 소피가 상심한 하울을 위해 무려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주면서 시작한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곧 자기중심적이란 특징으로 이어진다. 영화 후반, 하울은 소피를 사랑하게 되고 전쟁은 심화된다. 하울은 소피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널 지키고 싶다'며(ㅋㅋㅋㅋ시발) 전쟁에 나선다. 소피는 어떻게든 뜯어말리려고 움직이는 성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제물로 악마와 계약을 맺고... 여차저차 개고생을 하는데, 내 친구였으면 그런 유리멘탈 쓰레기랑은 당장 헤어지라고 뜯어말렸을 것이다. 

     

    하울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의 주변 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보면 어쩌다 그렇게 멘탈이 바스러졌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두려워하는 대상, 바꿔 말하면 그를 쫓는 인물은 그의 심장을 노리는 황야의 마녀와 그의 스승인 왕실 마법사 설리먼이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사람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황야의 마녀도 무시무시하지만 더 소름 끼치는 쪽은 설리먼이다. 하울(의 미남 모드)을 꼭 닮은 미동들의 수발을 받는 여자가 하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힘을 빼앗겠다고 협박까지 하는데 이쯤 되면 왜 하울이 악마랑 계약을 맺고 도망을 갔는지는 뻔하다. 하울이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쟁을 멈추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보면 전쟁도 하울을 손에 넣기 위한 명분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어 뒀던 이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전쟁까지 일으킨다니 무섭고도 추하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아들내미는 이미 다 커서 집을 나갔단 말이에요.

     

    가장 기가 차는 부분은 이런 하울을 소피가 온갖 '엄마 역할'로 보듬어서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엄마 역할'이란 단어에는 일말의 과장도 없다. '일반적인 로맨스'라는 거짓말을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썸을 타거나 한눈에 반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을 확신하기 전까지 소피가 무엇을 했는지 나열해보자면 요리, 장보기, 청소, 빨래 그리고 설리먼과의 학부모 면담이다. 미성숙한 남성의 결점을 돌봄 노동을 통해 보완해주는 여자와 그 남성에게 집착하는 여성 주양육자라니... 왠지 박준금 배우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부장제 여성 갈등 서사 다시 말해 고부갈등 로오-맨쓰였던 것이다. 

     

     

     

    "저희 붕가하겠습니다!"

     

    농담이다. 소피와 하울과 설리먼과 황야의 마녀의 관계가 며느리와 아들 그리고 시어머니 관계를 지시할 수는 있겠으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설리먼이 소피를 불러놓고 겁을 주기는 하지만 돈봉투를 건네며 하울과 헤어져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달걀을 재료로 누군가는 마요네즈를 만들고 다른 누군가는 온센 타마고를 만든다. 그들의 관계만으로 이 영화를 고부갈등 로맨스라고 결론짓는 것은 다분희 의도적인 오독이다. 미야자키는 김수현 작가가 아니니까. 관객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하야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고부갈등일 리가 없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저주를 푸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소피가 저주에 걸리면서 시작되고, 저주를 풂으로써 막을 내린다. 세부적인 디테일을 들여다보자면 끝이 없다. 미야자키는 상징과 은유를 좋아하고 이 영화 또한 그것들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보다 보면 영문 모를 장면 또한 적지 않다. 이를테면 성의 문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고, 소피가 그 문을 통해 과거로 가서 하울이 캘시퍼와 계약하는 장면을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 마녀는 왜 갑자기 하울의 성에 살게 되었다가 돌변해서 하울의 심장을 노리는 것인지? 하울과 소피의 저주(하울의 경우 정확히는 계약이지만)가 풀리게 된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그 무엇보다도 먼저, 마녀는 왜 갑자기 소피를 찾아와 저주를 건 것인지?

     

    영화 내용과 이러저러한 이론들을 되짚으며 위의 질문들에 답하는 것도 의미 있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2004년에 개봉한', '세계적인 거장의' 영화고 따라서 위의 질문들에 답하는 '해석'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미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을뿐더러 나는 영화 '해석'식의 감상이 싫다. (감독이 숨겨놓은 의미망을 찾아내는 식의 해석은 영화의 의미망을 두터이 하기보다는 단일하고 조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관한 방법론적 접근에 가깝고, 온갖 아저씨들이 크으,,, 하면서 '해석'을 주절거리는 것을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중요한 건 아님) 

     

    그런 고로 디테일에 집중한 해석보다는 영화의 큰 구조를 살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저주'는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저주의 전과 후를 비교해봤을 때 달라진 '무엇인가'를 정당화할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 저주의 역할이다. 백설공주나 개구리 왕자와 같은 동화에서 저주는 이후의 '혼인'을 정당화한다. 저주를 푸는 거랑 결혼이랑 대체 무슨 연관인지 모르겠지만 '저주를 풀면 공주와 결혼시켜준다'는 식의 부계적 교환 관계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마저도 아니면 대충 둘이 눈 맞았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저주는 이러한 사례와 다르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 모두 저주에 걸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명이 상대방의 저주를 풀어줘야 하는 교환적 저주와는 상이하다. 두 사람의 저주는 백설공주의 저주보다는 옹고집전의 저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옹고집에게 저주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이른바 개과천선의 계기다. 

     

    하울과 소피는 초반부와 비교할 때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울의 경우 확연한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에 하울은 겁에 질려있다. 그는 왕궁에 출두하는 것은 커녕 출전을 거절하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한다. 심지어 가명을 두 개나 사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다. 두려움으로 인해 설리먼으로부터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설리먼의 시동과 꼭 닮은 그의 외양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반전되는데, 그는 피해왔던 전쟁에 출전을 하고, 젠킨스와 팬드래건이라는 가명의 공간들을 정리한다. (젠킨스/팬드래건/하울의 성/검은색 > 꽃밭/소피 본가/하울의 성/검은색) 그는 더 이상 설리먼이 좋아하는 금발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성장'과 같은 긍적적, 윤리적 변화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당위적이고 작위적이다. 그의 저주는 풀렸고, 더이상 거짓말을 일삼다 마음을 잃게 되는 일(괴물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유약함, 의존적인 성격이 달라졌음을 의미할까? 나는 그가 결혼 후의 남자들이 아내를 '엄마'삼는 것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받아줄 혹은 거부해 줄 대상을 설리먼에서 소피로 옮긴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영화의 서사가 그에게 무의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 그는 금발 염색에 실패해 절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피의 경우 영화의 전반과 후반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저주의 내용은 저주의 결과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옹고집이 자신의 자리에 걸맞은 덕을 지니지 못한 것을 꾸짖기 위해 덕이 있는 가짜 옹고집이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울 또한 스스로에게서 도망쳐왔기 때문에 자신을 잃고 괴물이 되는 저주에 걸려있다. 소피의 저주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소피는 자기는 세 자매 중 장녀라서 멋진 모험을 못할 거라며 스스로를 저주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일축하는 그의 면모는 가능성을 잃은 존재인 노인이 되는 저주로 이어진다. 그러나 원작은 원작일 뿐이다. 미야자키는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고, (인물 이름 말고는 다 다른 듯) 소피라는 인물은 또한 예외가 아니다. 

     

    미야자키는 저주에 걸리기 전의 소피의 모습을 원작에 비해 훨씬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모자 가게 직원들이 다 같이 놀러 나갈 때 혼자 남아 일한다는 점이나 군인들이 찝쩍거릴 때 당황하는 점이라든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결국 불만족하는 듯한 모습과 하울은 미인만 노리니 자신은 괜찮다는 말, 그리고 물려받는 바람에 자신의 의지와 크게 상관없이 보잘것없는 모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의문이 드는 점은 과연 소피의 이러한 모습들이 그녀가 할머니가 되는 저주에 걸리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냐는 것이다.

     

    원작의 소피는 자신이 만드는 모자들에게 신세한탄을 하다가 마법 능력까지 얻게 되는데, 영화의 소피는 그처럼 저주 전의 삶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녀가 저주로 인해 할머니가 되고 하울의 성에 식모로 들어앉게 된 후에 '이렇게 마음이 평안한 것은 처음'이라며 저주 이전의 삶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지만 그것으로는 '저주'를 온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삶을 나아지게 하는 마법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피에게 내려진 것은 저주이며, 따라서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녀의 저주는 풀리고, 그녀는 '젊은 아가씨'로 돌아온다.

     

    영화는 저주가 풀리고 난 후에도 소피의 머리색을 되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걸렸던 마법이 '저주'였는지, 아니면 '축복'이었는지 애매하게 만든다. 이 마법이 소피에게 '축복'이었다는 점은 그녀 스스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이 이 마법을 '저주'로 만드는 것인가? '저주'가 풀림으로써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짱짱한 무릎 관절과 넉넉한 기대 수명이라 답하며 너스레를 떠는 것은 그녀가 '얻은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조금 민망할 것 같다. 그녀가 얻은 것은 하울이다. 그녀는 다시 젊어짐으로써 이 로맨스를 완성시킨다. (하울과 소피가 얽힐 때마다 소피가 잠깐 젊어지는 연출은 다소 노골적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성에서 키스를 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이 마법은 언제가 풀릴 '저주'여야만 한다.

     

    마법이 한 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하다는 점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미야자키가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뜯어고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정상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많은 일이 정리되지만, 과연 그것이 '하울과 소피가', '저주를 풀어가며', '사랑을 했기'에 가능했을까?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영화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영화처럼 성애적인 것이 아닐 경우(영화가 밋밋하고 프로파간다 같겠지만)  2. 마법이 풀리지 않고 할머니인 채로 사랑하는 경우 3. 소피가 성에서 살게 되는 게 마법 말고 다른 이유일 경우 등 저주가 애초부터 없거나, 언젠가 풀려야 하는 '저주'가 아닌 경우에도 얼마든지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다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했던 로맨스가 아니게 될 뿐이다.

     

    결말을 약간 더 바꿔버릴 상상을 해보자. 하울의 저주가 풀리지 않고 고분고분한 인외 괴조남인 상태로 영화가 끝나는 건 어떨까?(괴조여도 반반한 얼굴은 남아있던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징은 개박살 나고, 하울은 업보를 치러야 할 테지만 소피의 '저주'가 고작 '정상 로맨스'를 위해서였단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잔악무도한 상상은 아닐 듯하다. 하울이 인외 괴조남일지라도 소피가 지루했던 과거를 벗어던졌단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말의 '정상 로맨스'가 없을 테니 마법은 '축복'이 된다. 소피의 동거인인 마녀는 갑자기 찾아와 저주를 건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축복을 선사해준 고마운 존재가 된다. 아마 가장 득 보는 존재는 설리먼일 것이다. 그녀라면 자기가 가지지 못하면 차라리 망가져 버리길 바랄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그가 파멸함으로써 자신의 말대로 되었다는 점에 만족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외 괴조인 하울이, 소피를 또 다른 엄마 삼은 하울보다 훨씬 매력적이란 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개구리 왕자>를 읽었다면 누구라도 해보았을 생각일 것이다. 왕자보다는 말하는 개구리가 더 근사한 법이니까. 영화는 행복한 듯 막을 내렸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앞날이 다른 형태의 저주는 아닐지 걱정될 따름이다. 

     

     

     

     

     

     


    후기

    이거 왜 이렇게 오래 썼지... 내용은 영화 보면서 생각한 거랑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쓰는데 거의 두 달 넘게 매달렸다

    ...고통 

    오래 끓이다 보니 맹탕된 거 같음... 얼큰하고 웃긴 부분 다 어디 갔냐고 굳이 글로 쓰려한 내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하울 ㅊ ㅐ ㅇ 넘 새끼라고 낄낄거리기나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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